KBS는 1TV를 통해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생방송하였으며 이를 전량 녹화하였다. 녹화원본 테이프 463개와 방송과정에서 생산된 사연판, 큐시트, TV편성표, 라디오 녹음자료, 사진 등은 사실 그대로를 고증하는 1차 자료이자 원본이며, 생산된 이래 KBS아카이브에서 계속 보존되어 왔다. 중앙정부 및 지방 자치단체가 생산한 기록물은 대부분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 있다.
TV, 전쟁과 분단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다.
기록물은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인권과 보편적 인류애를 고취시킨 생생한 기록이다. 이산가족을 찾겠다는 인파가 계속되는 여의도광장과 KBS 주변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비에르 패레스 데 게야르(Javier P?rez de Cu?llar) UN사무총장은 김경원 UN주재한국대사와의 회담(1983.7.21.)을 통해 이산가족의 비극에 대해 깊은 동정과 이해를 표했고, 제70차 IPU[Inter-Parliamentary Union] 서울총회에 참석한 7개국 17명의 위원과 국제인권연맹 이사 일행이 현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시에서 개최된 ABU[Asian Pacific Broadcasting Union] 총회(1983.10)에서는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30분짜리 영어판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KBS 본관 중앙홀에 마련된 기자실에는 전 세계 25개국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상봉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하였다. 미국 ABC는 “나이트라인(Night Line)”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그램은 인도적인 관점에서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1983년 9월 6일부터 사흘간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 시에서 개최된 제6차 세계언론인대회는 이 프로그램을 “1983년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하였다.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영국 그리니치대학교에서는 방송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4년 2월 17일 아프리카 가봉에서 열린 제24차 “골드·머큐리 세계평화협력회의” 총회에서는 방송기관으로는 처음으로 “1984 골드머큐리·애드 호너렘 (AD HONOREM)”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인사나 기관에 시상하여 왔으나 가 전쟁의 상처를 고발하고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고취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수여한 것이다.
TV, 냉전의 종식과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하다.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냉전이 개개인들에게 내면적으로 입힌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격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의 이산가족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는“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1983.7)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레이건 미국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방문연설(1983.11)에서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의 성공을 언급하며 북한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이산가족찾기 방송 2년 후에 북한 대표단이 KBS를 방문(1985.5)했고 역사적인 남북한 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4년까지 남북한의 이산가족 총 18,523명이 상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산가족찾기 방송 7년 뒤에는 한국전쟁의 당사자이자 공산권의 대부였던 소련과의 수교(1990.9)도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되었다. 이처럼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국제 냉전질서의 극복과 남북한의 긴장완화에 기여했다.
TV, 전 국민의 참여와 공감을 이끌다.
프로그램은 각계각층의 참여와 공감을 이끌어 내 전쟁세대와 전후세대간의 세대단절 극복과 국제 냉전질서의 완화에 기여했다. KBS는 그동안 방송에서 수신자 위치에 머무르던 대중의 직접적인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10만 명이 넘는 시청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신청접수 전화만도 하루에 6만 통에 이르렀다. 이는 세계 방송역사상 유례가 드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매일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평범한 이웃들의 상봉장면을 통해 전 국민은 이산가족과 함께 울었고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에 몸서리를 쳐야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1983년 10월 10일부터 20일까지 전국의 1천4백50가구를 무작위로 추출하여 개별면접을 실시한 결과, 전체 조사대상자 중 53.9%가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새벽 1시까지 시청한 적이 있고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는 사람은 88.8%에 달했다. 방송 3일째부터는 학생·주부·일반시민들 주축으로 안내, 의료봉사, 신청서 대필 등의 자원봉사가 시작되었고, 컬러TV, 공중전화, 이동화장실, 기차표, 생수, 빵, 라면, 부채, 수건 등을 기탁하는 개인과 기업체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각 기업체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자에게는 특별휴가가 부여되기도 하였다. 정부 또한 북한에 1천만 이산가족문제의 해결을 위해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등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남북한의 인도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 지원하였다.
시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후 세계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으로 빠져든다. 그 최전선에서 한국전쟁(1950.6.25.)이 발발했고 한반도에서는 약 2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약 1,000만 명의 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정전 이후 30년이 지난 1983년에도 냉전체제는 여전히 강고했다. 소련은 태평양을 날아가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1983.9)시켰다. 북한은 미얀마에서 한국의 대통령을 향해 테러(1983.10)를 감행했다. 한반도에서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해 6월, 서울 여의도에서는 1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을 간절히 기다리며 여의도광장과 KBS 앞에 운집했다. 전 국민들은 상봉장면을 TV화면으로 보면서 감격과 통곡으로 오열했다.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천만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조속히 남북적십자사 회담을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1983.7)을 발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1983.8)에서 “남북한 간의 이념과 제도가 다르다 하더라도 이산가족 문제해결은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년 후에 역사적인 남북이산가족의 최초상봉(1985.9)이 성사되었다. 프로그램은 1980년대 냉전체제의 극복이라는 평화운동의 상징이었고,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인류의 평화를 웅변하였다.
장소
기록물은 유일한 분단지역이자 냉전의 최전선인 한반도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눈물의 재회를 통해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치유시켜 준 한민족의 대서사시이다.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 다음날 아침부터 KBS가 소재한 여의도 인근은 출연을 신청하려 밀려드는 이산가족들로 인산인해였다. KBS본관 건물 벽면은 물론, 인도, 여의도광장, 가로수까지 가족을 찾는 벽보로 뒤덮여 장관을 이뤘다. KBS본관 중앙홀은 방송 신청을 접수하러 온 사람, 방송출연을 끝내고 상봉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 전 세계 25개국에서 파견된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KBS본관 공개홀(TS-1)은 생방송을 진행하는 스튜디오이자 메인 스테이지였으며, 이산가족을 찾는 출연자의 애타는 모습과 가족을 찾아주려는 직원들의 노력, 눈물의 상봉장면이 펼쳐지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사람
기록물은 이산의 아픔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체념해 살아 온, 보잘 것 없는 일반인들의 개인 기록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도 역사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42년 만에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실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다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누나와의 상봉 후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KBS 만세!, 공영방송 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33년 동안 생사조차 모르던 형제자매가 방송이 아닌 접수창구에서 몇 마디 대화로 한 핏줄임을 환호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또한 각자의 사연을 알리고자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총동원되었다. 마네킹을 세워놓은 사람, 염소를 데리고 나온 사람, 금관을 쓴 사람, 허수아비 복장을 한 사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 ET 인형이나 자동차, 오토바이 등에 사연을 써 붙인 사람 등 저마다 눈길을 끌려고 애를 썼다. 이처럼 방송 출연자들 대부분은 서민·중산층이었다. 그동안 일부 상류층은 그들의 사적 자원과 전화, 신문광고 등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 대부분 ‘이산’을 극복해 왔던 반면,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자원 접근이 쉽지 않았던 대다수 서민·중산층에게는 이를 극복할 방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KBS는 138일이라는 미증유의 장기방송을 통해 국민 대다수가 공중매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주체가 되어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본 기록물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 인하여 비자발적으로 이산의 아픔을 겪어 온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하여 구술한 영상기록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대상/주제
「전쟁과 분단의 고통, 그리고 상처의 치유」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 시대를 살아온 1천만 이산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참상을 고발하고, 30년 이상 헤어졌던 이산가족들의 눈물의 상봉을 통해 ‘이산’의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인권과 인류애」 30여년 만에 만난 가족들이 얼싸안고 울부짖는 이산가족의 모습에서 끈끈한 가족애와 형제애를 확인시켜 주었으며, 남북한의 체제와 이념 차이로 만날 수 없는 미상봉 이산가족들의 애환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은 정치, 군사와는 별개인 인도주의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보편적 인류애의 기록이다.
「평화와 통일」 프로그램은 이산가족문제가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통일을 통해 남북한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알게 해 주었다. 또한 지구상에 이와 같은 비극이 또다시 생겨나서는 안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했다.
형태 및 스타일
프로그램은 사람을 찾는 도구로 TV를 사용했다는데 그 독창성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컬러TV가 보여주는 생생한 인상과 풍부한 표정은 이산가족찾기 운동의 성과를 극대화시켰다. 헤어진 가족의 이름과 얼굴을 잘 몰라도 출연 모습만으로 서로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 이후 유사한 구성의 사람찾기 TV프로그램이 쏟아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방송과 병행하여 실시한 컴퓨터 조회 서비스는 방송에 첨단기술을 접목한 성공적인 시도였다. KBS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및 치안본부 컴퓨터와의 연결, 상호검색을 통해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과학화하며 상봉 성공률을 높였다. 한편 기록물은 동일 주제를 가지고 138일 동안 장기 방송된 마라톤 형식의 프로그램(Telethon)이다. 이를 위해 방송제작 전담인력만 1,641명이 투입되었고, 서울 본사와 21개 지역국, 송중계소 등 전 네트워크에서 5천여 명의 직원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희귀성
기록물은 TV라는 매체가 탄생한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의 참여와 접근을 보장한 기록이라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방송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기 캠페인으로 기네스북(1993년판)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나라는 많지만 전쟁의 아픔과 상흔을 TV를 통해 이처럼 가장 처절하게 표현한 프로그램은 가 유일하다. 본 기록물은 KBS의 단독 저작권 관리로 유일본이며 외부 복제는 불가하다. 상봉 신청명단 총100,952건은 7권의 책자에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방송출연자들이 친필로 적은 신청접수 대장과 사연판 등이 원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원 상태로의 보존
기록물은 대부분이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생방송 녹화원본 테이프(463개)와 1만 7천여 점의 사진, 이산가족 신청자의 친필로 작성된 사연판, 이산가족 접수대장, 당시 방송 편성표, 큐시트, 업무분장표, 근무교대표, 제작진 업무수첩(1983년) 등을 원본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물품구입, 제작진 식대 등 지출결재서, 이산가족 인명부 배포현황 등의 문서류는 디지털화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생방송 스튜디오, KBS 주변, 여의도 광장 및 만남의 광장에 부착된 벽보, 현수막을 촬영한 사진과 특별생방송 당시 타이틀곡,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음반들을 원본 및 디지털 파일로 보유하고 있다.
위협
현재까지 영상, 사진, 음향기록물 보존에 있어서 큰 위협 요소는 없다. 등재 신청된 기록물은 KBS 영구 기록물로서 항온항습 상태로 보존되며, 기록물의 내용은 열화 및 소실을 대비하여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여 보존하고 있다. 디지털 파일은 비디오아카이브(KDAS), 오디오아카이브(AAS), 사진아카이브를 통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다만, 영상 및 녹음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장치의 생산이 중단되거나 고장수리를 위한 유지보수가 어려울 경우 직접 재생이 불가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기록물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 완료하였다. 종이기록물의 경우 개인소장이 많아 보존대책이 절실하다.
관리 계획
생방송 녹화원본 테이프(463개)와 사진 기록물, 음반은 항온항습 시설이 완비된 보존고에 보존되어 있다. 종이류는 탈산처리를 하여 보존할 예정이다. KBS가 소장한 기록물은 전량 디지털로 변환하였으며, 데이터베이스로 검색 가능하다. 특히 방송 출연자별로 메타데이터를 상세하게 작성하여 출연자 이름으로도 검색할 수 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시청자들의 이산가족찾기 기록물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KBS 이산가족찾기 웹사이트’에서 당시 출연자 동영상의 검색·제공 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한 도록(圖錄) 발간과 9개 지역국을 통한 전국 순회 전시 등도 계획하고 있다.